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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11. 15:09 카테고리 없음

posted by 아니카
2009. 7. 4. 15:18 카테고리 없음

The Book of Tea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906년, 미국 뉴욕에서 한 일본인이 영어로 된 책을 발간했다. 저자는 당시 보스턴미술관에서 동양부장으로서 국제적 명성을 날리고 있던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펴낸 책은 바로 “The Book of Tea”. 이후 이 책은 오늘날까지 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양의 차를 서양인들에게 알리는 데 가장 인기 있는 책으로 손꼽혀왔다. 이 책은 아직도 미국 온라인서점에서 꾸준히 판매되고 있으며, “다도를 통해 일본의 전통문화를 가장 재미있고 매력 있게 해설한 책”이라는 서평에서는 서양인들이 이 책을 통해 다도(茶道)를 넘어서 일본문화, 나아가 동양의 전통문화에 얼마나 매혹되었는지 알 수 있다.

낭만적 사상가 오카쿠라 텐신

1862년에 요코하마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메이지유신을 겪으며 성장한 오카쿠라 텐신은 불과 27세에 도쿄미술학교 교장으로 취임할 정도로 뛰어난 청년이었으며, 예술과 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후 일본미술원을 창립하는 등 일본미술의 근대화와 국제화를 도모하였으며, 서구미술과 그 이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새로이 일본화라는 전통을 확립하고, 일본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주도했다. 이 책 외에도 『동양의 이상(理想)』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동양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는데, 그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으며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요구와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심미적이고 관조적인 텐신의 성향은 역사의식의 부재와 함께 정치현실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차는 약용으로 시작하여 음료가 되었다. 중국에서 8세기에 고상한 놀이의 하나가 되어 시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15세기 일본에서는 그것에 기품을 부여하면서 심미주의라는 종교, 즉 다도(茶道)로 드높여졌다. 다도란 하찮은 일상 가운데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앙, 그것에 기초한 일종의 의례이다. 다도는 순수함과 어울림, 보시의 신비, 사회 질서의 낭만성 등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에 대한 숭배이니, 말하자면 불가능의 연속인 이 인생에서 무언가 가능한 것을 성취하려는 은근한 시도다.-책의 첫머리에


지금 왜 『차의 책』인가

100여 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아직도 읽히고 있다면 단순한 과거의 유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일본문화, 특히 다도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통째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역자는 번역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일본 다도, 그 이상과 실상의 거리

동아시아의 문학, 사상 등을 비교연구하고 있는 역자 정천구는 말미에 해제를 달아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터무니없는 서양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동양 문화의 가치를 서양에 전파한다는 책 본래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텐신은 심미적이고 비역사적인 성향으로 인해 정치현실을 바로 보지 못함으로써 일본문명이 최고라는 국가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또한 다도의 이상적인 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상과 이상의 괴리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다도보다는 다법에 치우쳐 형식적으로 점점 까다로워지고 번잡해진 일본 차문화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또한 다실을 꾸미고 다기를 갖추며 한복을 차려입는 일, 그것은 형식일 뿐이라며 자칫 우리네 차문화 또한 형식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책의 구성

posted by 아니카
2009. 5. 28. 16:08 카테고리 없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다가 지난 해 만들었던 책이 생각이 났다.
영광과 굴욕을 모두 겪어야만 했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이렇게 쓸쓸히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내 마음도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하고, 인생이 뭔지 존재가 뭔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타니 타다시(谷貞志), 《무상의 철학》 (권서용 옮김, 산지니, 2008)

인생 무상이라더니...

『무상의 철학-다르마끼르띠와 찰나멸』은 책 7세기 인도의 철학자 다르마끼르띠의 철학을 담은 책이다.7세기 인도에 혜성같이 출현한, 인도철학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철학자 다르마끼르띠는 '무상의 증명'에 필생의 철학적 노력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무상'은 시간이라는 존재 속에서 살아가는 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나 자신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비통한 슬픔이 '무상'을 꿰뚫고 있다.

'삶' 그것은 자기 자신 속에 이미 '스스로의 비재'로서 '죽음'을 내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순간적으로 비재화함과 동시에 '비재'로부터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새로운 독자적 존재의 섬광을 창발한다. 붓다의 최후의 말씀 즉, '거기로 향해 마음을 집중하고 노력을 집중하는 곳'은 바로 이 '순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를 논리로서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다르마끼르띠의 철학의 핵심이다.


타니 타다시가 알려 준 무상의 두 가지 의미는 이렇다. 첫째 “삶이 죽음에 의해서 단절된다.”라는 의미에서 무상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존재의 덧없음을 한탄할 때 쓰는 표현이다. 둘째 “무상은 무상을 통찰하여 청정한 적정에 도달했다.”라고 할 때 무상이다. 여기서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경계선은 불탄다.

다르마키르티의 ‘무상의 철학’은 분명 존재의 실상을 알린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객관 사실에 대한 확인 절차가 아니다. 앞서 ‘죽음 극복’이라고 했듯이 그것은 우리 실존의 문제다. 매 순간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이다. “죽음이라는 타자와 결정적 만남의 순간은 필연임과 동시에 우연이다.

그것은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단념하는 비재의 순간에 생의 한복판에 가로놓여 깊게 각인된다.” 생의 한복판에 일어나는 죽음. 이 비재의 순간에 다시 새로운 순간이 섬광처럼 일어난다. 저자는 ‘회광반조(廻光反照)’라는 선가의 용어를 빌려서 이 순간을 설명한다. 죽음의 한복판에서 다시 생을 비춘다. 만약 우리가 순간적 존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수행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비재의 순간을 되비추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자 서문에서도 밝혔듯 타니 타다시는 《찰나멸의 연구》라는 대저가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전문적인 책 말고 좀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찰나멸의 철학성을 설파하고자 했다. 《무상의 철학》은 바로 이런 의도로 쓰인 책이다.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지적한다. 맺는 글에서 그는 이 책이 “일반 서적으로는 너무 이론적이고 학술 서적으로는 너무나 주관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돌려주고 싶다. “일반 서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심오하고 학술 서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감동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 일 것이다. 첫째, 저자는 삶에서 붙잡은 절실한 문제를 자신의 학문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바로 성찰이다. 두 번째, 저자는 다르마키르티의 찰나멸 이론을 문헌학적인 사실 규명 차원에서 철학의 수준으로 한껏 끌어올렸다. 이것은 불교 공부하는 사람의 꿈이다.

찰나멸과 차이의 철학 / 김영진 (불교평론)



온 나라가 침울하기도 하고,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며 지난날을 반성하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은 종이의 앞뒷면이라고도 하고, 살아가면서 항상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존재를 '찰나멸'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며 죽음을 정시한 다르마끼르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도 가지가지일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그 죽음이 나한테 미칠 영향이 어떠한지를 먼저 계산하느라 바쁜 것 같다.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테고, 겉으로만 슬퍼하는 척하며 속으론 쾌재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그 속에서 나는 <무상의 철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posted by 아니카
2009. 5. 27. 11:42 카테고리 없음

책을 만들기 위한 편집과 교정작업 때문에 늘 노트북을 끼고 사는 엄마.

4살짜리 아이는 그런 엄마한테 늘 놀아달라고 치대기 마련이다.

급하게 해야 할 작업 때문에 또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데 원서가 다가왔다.

"엄마 나도 할래."

무릎 위로 기어 올라 제가 자판을 만지작거린다.

"안 돼 ~~~~~"

지금까지 해놓은 작업 다 망치면 안 되는데... 할 수 없이 아이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

"원서야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

하고는 엔터키, 스페이스, 델리트 키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작업을 하다가 엔터키를 쳐야 할 시점에서 "원서야. 엔터키" 하면 아이가 엔터키를 누르는 것이다.

시켜보니 곧잘 했다. 그리고 재미도 있는 모양이었다.

"엔터키" 하면 엔터키를 누르고, "야 잘했다." 한번 해주고,

"스페이스" 하면 스페이스키를 누르고 "진짜 잘하네." 한번 더 칭찬해주고,

"델리트키" 하면 "엄마 이거?" 하고는 "응~" 하면 또 누르고

그렇게 한참을 일했다.

 

며칠 후....

 

또 책상머리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엄마한테 아이가 다가와서 하는 말,

"엄마. 나 딸기 할래."

"딸기? 여기 딸기가 어딨어? 원서 딸기 먹고 싶어?"
"아니... 딸기.. 딸기.."

갑자기 웬 딸기를 찾는담?

"여기 있잖아, 엄마"
그러고서는 누르는 게 바로

 

 

이 델리트키였다.
 '델리트키'가 '딸기'로 변한 순간이었다.

posted by 아니카
2009. 5. 27. 10:15 카테고리 없음
둘째와 막내를 데리고 어린이책시민연대에서 주최하는 책잔치에 다녀왔다.
연제구청 앞마당과 대강당을 빌려 행사를 하고 있었다.
잔디가 깔려있는 연제구청 앞마당은 포근하고 아늑해보였다.

행사 주제는 "얼쑤, 우리신화!!"였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밀려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대접받지도 못했던 우리 신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취지였고, 우리 신화의 모습을 아이들한테 느끼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아이들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삼신할미. 아이를 점지해서 태어나게도 해주고, 태어난 아이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게도 해준다는 그 삼신할미 체험마당이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이야기방에서는 삼신할미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신할미가 서천꽃밭에서 꽃 한송이를 따 아이한테 주면 아이는 그걸 들고 자기가 태어날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동쪽에서 핀 푸른꽃은 아들, 서쪽에서 핀 하얀 꽃은 딸, 남쪽의 붉은 꽃은 오래오래 사는 아기, 북쪽의 검은 꽃은 짧게 살 아기, 가운데 핀 노란꽃은 여러 사람 위하며 살 아기라고 한다.

아이들은 삼신할미 신화 이야기를 듣고, 각자 자신의 운명이 담긴 꽃을 색종이로 접어서 거기에 소원을 한 가지씩 쓰고,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붙인 다음 기나진 굴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오면 수수떡을 한 개씩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삼신할미 신화를 가지고 재밌게 체험해볼 수 있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우리 막내는 젯밥에만 관심이 많아 체험은 하나도 안 하고 그저 떡만 얻어먹었다.
수수떡만 열심히 먹는 원서


그래도 투호놀이에는 좀 관심이 가는지 열심히 던지다가 제 아빠랑 함께 빛그림을 보러 갔다.


원서는 빛그림을 좋아한다. 빛그림은 그림책을 커다란 화면으로 보는 건데, 음악과 함께 실감있게 책을 읽어주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마을도서관에서도 자주 빛그림을 해주는데, 세 살 이전에는 거의 딴청만 피우고 집중을 안하더니 네 살이 되니 열심히 본다. 한 번은 마을도서관에서 <고녀석 맛있겠다>라는 빛그림을 보았는데, 그때 필이 꽂혔는지 책을 보고 또 보고 한동안 아주 그 책을 끼고 살았다. 티라노사우르스와 안킬로사우르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데, 책에 대한 관심은 급기야 공룡 모두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여 결국 고성 '공룡엑스포'까지 다녀왔다.
(공룡엑스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posted by 아니카